최씨의고찰
최성의 원조 소벌도리(崔姓의 元祖 蘇伐都利)
우리 최씨의 득성(得姓)과 함게 원시조가 되는 신라 개국공신으로 양자 혁거세왕과 더불어 신라 천년사직을 이루며 오늘날 찬란한 문화와 화랑정신을 만대에 계승 발전시켰다.
년원(淵源)
진한의 소벌도리와 최씨(辰韓의蘇伐都利와崔氏)
최씨는 우리 겨레 가운데서도 가장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역사상 숱한 명신 열사, 학자, 문인을 배출한 라조(羅朝) 이래의 전통 있는 명문으로 손꼽히는 삼한갑족(三韓甲族) 이다. 우리 동방에서 최씨 내력을 알고자하면 먼저 소벌공부터 알아야 한다. 소벌공은 본명이 소벌도리이니 그 당시 진한의 방언으로 지은 것이요, 후에 역사기록에서 소벌공이라 명칭 하였지만 소벌은 성씨가 아니고, 부르기 쉬운 약칭인 것이다 그 당시 소벌도리는 하나의 이름뿐인 것이다 그러나 지위를 보아서 후세인이 공(公)자를 붙혀 존칭한 것이요 당시 제도로 보아 이름자만 호칭한 것이다 소벌공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백여년 전의사람으로 삼국유사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듯이 기록이 있으나 사기(삼국사기 동국통감)등 정사에는 그러한 천강설(天降設)은 없고, 다만 진한의 고허촌장 이라고 말하여 어디로부터 왔는지 생래(生來)는 불분명하므로 그를 연구함에는 정사를 따라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조선의 유민사(遺民史)에서 진한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기로 한다.
소벌공은 본래 진한 사람으로 신라를 창건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니 삼국사기, 신라본기 동국통감에서 본 그의 사기는 다음과 같다.
6촌장과 진한(六村長과辰韓)
기원전 57년경 고조선의 북부여 유민들이 동해빈의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을 이르고 있어는 데. 첫째마을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둘째 마을은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셋째마을은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네째, 취산진지촌(취山珍支村 혹은 宇珍村)다섯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여섯째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라는 마을들이 있었다. 고조선의 유민이란 단군-기자의 조선임을 말함이요, 동해의 여러 산골짜기(東海濱山谷間)란 지금의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와 경기도 일부, 충청도 북부 즉 괴산 이북인 충청북도 전역을 지칭하니 이것이 본래 진한의 위치가 대개 그렇게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진한이란, 마한과 변한을 통하여 삼한이라 하였던 것이요, 그 삼환중 최초엔 제일 강하였으나 후에 점차 약해짐에 따라 마한이 제일 큰 나라가 되었으니 마한은 이미 한혜재(漢惠宰)2년(단기2142)부터, 진한과 변한 두 나라를 섭치(攝治)한 것으로 보면 진, 변 두 나라는 당초에는 통치자(盟主)가 있었으나 붕괴되어 다시 일으키지 못했던 것 같으며, 또 삼국유사에는 변한이 각기 열두개의 소국이 있다 햇는데 이소국들 자체가 군소 집단으로서 국호를 가지고 생활하여온 듯하다. 그러므로 6부의 촌장도 나라의 왕이 없고 백성들만이 각자 나름대로(放逸)살아 가무로 어려운 질서를 근심하게된 것으로도 족히 그때의 형태를 알수 있으며, 이 삼한의 경계를 말하면 진한은 지금의 경기도 일부와 경상도 일부, 충청도 일부이며 변한은 경상남도 한 일부로 보는 것이 타당 할 것 같다, 이곳은 후에 수로왕이 금관국(加羅)을 세웠다.
소벌공과신라건국(蘇伐公과新羅建國)
위와 같이 삼한이 반도남부에 정립하고 있었으나, 진한은 명실공히 군주국가가 되지 못하고 백성들만이 마한의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 백성들은 항상 국가건설을 계획하고 있던 터로서 마한의 양왕5년(단기2265년한무재(韓武宰) 원년)임자 어느날 6촌의 고허촌장 소벌공은 다른 촌장들을 소집하여 건국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소벌공은 그해 3월 삭일에 양산촌장 알평, 대수촌장 구례마, 진지촌장, 지백호,가리촌장기타, 고야촌장 호진등 다섯 촌장과 더불어 알천안상에서 회의를 열도록 소벌공이 제안하니 각 촌장들은 이에 모두 찬동하고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참석하였다. 소벌공은 이 회의서 의장 격이 되어 말하기를 지금 우리들의 많은 민중이 기름진 좋은 땅에서 태평성대 하게 살면서도 우리를 다스릴 어른(君主)이 없는 까닭에 백성이 모두 제멋대로(放逸)하며 살고있으니, 뭉치고 단합하는 힘을 갖지 못하는 형편이므로, 항상 남의(馬韓)나라의 부당한 간섭과 제어(制御)를 받게되고, 또 인접한 변(弁韓)한도 종 종 침해하는 일이 자주 있을 뿐 아니라. 멀리 북으로부터 한(漢)의4군이 머리를 누르고있어 언제나 그것들이 우리의 진전에 크게 방해되는 바인즉 우리는 지금부터 좋은 군주를 얻어 뫼시고 국가정사를 새롭게 하면 이거야말로 자손만대에 백년대계를 이르게 될 것이니 이를 위해 총력을 다함이 어떠하겠는가 ? 고 말하니 모든 촌장과 자제들은 이에 동의함은 물론, 크게 협력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소벌공은 이제 군주를 澤정하는 것만이 남았는데 어떤 군주를 간택하여 백성들의 축복을 받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 채 높은 언덕에 올라, 6촌의 아름 다음과 기름진 대지를 바라 볼때 우연히도 이상한 조짐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발길을 그곳으로 옭기고 있었다.그것은 남쪽의 양산 밑 蘿井(계림부근)옆 숲풀 사이로 마치 번개같은 서광이 번쩍거리며 그 속에서 한 백마가 꾸물 거리고 있는 것이 선명히 보인다.이상히 여긴 소벌공은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본 즉 말은 앞발을 꿀어 절하는 모양으로 몇 번 굽히다가 긴-소리를 지르더니 하늘로 살아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푸릇 불긋한 큰 알(大卵) 한 개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소벌공은 그 알을 얻어 깨어본 즉. 이것은 또 웬일인가! 알속에서는 뜻밖에도 동자하나가 나오는데 형태의용(形態儀容)이 대단히 단정하고 아름다음으로 일면 놀라 웟고 한편으로는 기이(奇異)함으로 소벌공은 서둘러 얼사 안고 곧 동천(東泉寺=우물사)에 가서 목욕을 시키니 아이의 몸에는 광채가나고 그 주변의 새들이 날러와 너울너울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며 일월이 청명해지는 조짐부터가 심상치 않으므로 공은 좋아서 집으로 데리고와 귀중히 기르며 그때의 광경을 상징하여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 혁거세가 13살 되던 해 단기2277년 한선재오봉(漢宣宰五鳳)원년에 소벌공은 다시각 촌장들을 불러 회의를 열고 혁거세의 자질이 비범함을 자세히 설명한 후 왕으로 추대할 것을 제의하니 제 촌장들은 이에 찬동함으로 곧 위에 오르게 하고 국호를 서군벌이라 하니, 다시 서라벌, 신라의 일명으로 진한의 옛 땅에 한 신생국이 된 것이다. 신라는 장차 마 변 양국을 통일하여 당 당 한 동해의 대국이 될 기업을 닦고 천년사직의 융성한 나라가 되었으니 이는 소벌공의 공적이요 각 촌장들의 보필로 혁거세와의 선정이 베풀어 졌음을 뜻한다.그중에 서도 더욱 소벌공으로 말하면 혁거세가 탄생한 대란을 얻음이라든지, 여기서 나온 동자를 13년 간이나 수양한 관계라 든지 등을 고찰하여 혁거세는 즉 소벌공의 수양아들 격이니 어린왕을 보좌함에 있어서 실상은 섭정과 같이 국정에 진력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 19년에(三國遺事) 변 한이 나라을 받쳐 항복해왔고 국기는 더욱 확고해져가면서 동해의 나라 신라는 대국으로 발전해 간 것이다(참고 변한 합병시기는 이설이 있다 혁거세 19년 (서기399) 위군침입시 고구려군5만을 원군으로 임나와 가라를 항복케 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6부에6성 사성 (6部에6姓 賜姓)
신라의 3대 유리왕은(신라9년2365) 구진한의 6부에 지명을 개칭하여 양산촌을 급량부(及梁部)로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대수촌을 잠량부(잠梁部)로 간진촌을 본피부(本皮部)로 가리촌을 한저부(漢저部)로 명활촌을 습비부(習比部)로 하는 동시에 그6부의 장(長) 에게 각각 성을 내렸으니 賜 사량부(고허촌)의 장 소벌공은 최(崔)씨의 성을 받았다. 그 외 양산촌,알평에게는 이(李)씨, 대수촌 구례마에계는 손(孫)씨 진지촌 지백호에게는 정(鄭)씨 가리촌 기타에게는 배(裵)씨 명활촌 호진에게는 설(薛)씨 이렇게 하여 6부의 6성을 내린 것은 원래 진한의 6촌장이 신라국에 큰공을 세운 연유로 사성(賜姓)이 되었으며 당시 민간으로서는 처음 성을 갖게 된 것이다. 아동반도에서는 단군이래 일반인에게는 성씨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삼황과 오제(三皇五帝) 때 이미 성이 있었다하여 대허벌 의씨가 풍(風)성, 염재신농씨가 강(姜)성, 황재헌원씨,(公孫)공손으로 삼황의 각성인 것이다. 또 오제로는 소호, 김천(金天)씨, 전욱 고양(高陽)씨 제여, 고신(高辛)씨, 제요국당(?唐)씨.가 모두 공손이며 순재유우(有虞) 씨 요(姚)씨로 되어 있고 삼대이하로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마다 성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箕)씨 조선이라 하여 기자(箕子)로서 그 성이 기씨라 하되, 기자도 실은 기 때에 봉한 자작(子爵)이었으므로 기자라 칭한 것이며, 신라의 소벌공 만 하더라도 소벌도리의 4자를 양분하여 머리의 2자, 즉 소벌에다 공자(公字)를 붙혀 소벌공이라 한 것이 마치 소벌씨 같이 보이기도하나 사실 소벌도리는 하나의 이름인 것이지 소벌은 성이요 도리는 이름이었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유리왕 때 사성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최초의 성씨요 역사상 오랜 성씨라 하겠다. |